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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사상으로 본 서양철학사
통일사상으로 본 서양철학사
  • 저자 권상기
  • 출판사 울림과세움
  • 판형 지면 : 344쪽 | 판형 : 신국판
  • 발행일 2026-08-15
  • ISBN 979-11-997671-2-6 (03100)
  • 정가 20000

미리보기

책소개

가장 오래된 질문이 가장 현대적인 이유

인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오래된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이 옳은가.' '이 우주에서 나는 무엇인가.' 스마트폰의 빛이 온 지구를 밝히고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유를 흉내 내는 시대에도, 이 물음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절박하고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우리는 전보다 훨씬 많이 알지만, 전보다 훨씬 더 길을 잃고 있습니다.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태어납니다.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 해안의 작은 도시 밀레토스에서 탈레스라는 한 사람이 처음으로 물었습니다. '이 세계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그 전까지 인류는 번개를 제우스의 진노로, 홍수를 포세이돈의 분노로 설명해왔습니다. 탈레스는 달랐습니다. 신화 대신 이성으로, 이야기 대신 논리로 세계를 설명하려 했습니다. 이 단순한 태도의 전환이 서양 철학의 출발이었고, 이후 2,500년에 걸친 인류 지성사의 대장정이 시작된 순간이었습니다.

왜 지금 서양 철학을 읽어야 하는가

동양에도 공자의 인(仁), 노자의 도(道), 부처의 연기법과 같은 위대한 사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세계의 물질적·제도적 뼈대는 압도적으로 서양 철학의 산물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과 삼권분립의 원리는 몽테스키외와 로크의 정치철학에서 왔습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에는 공리주의자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현대 심리학의 기초는 프로이트가 놓았으며,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는 쿤의 선물입니다.

더욱이 21세기의 우리는 서양 철학이 제기한 문제들을 그 어느 시대보다 직접적으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과 사고를 대체할 때 '인간의 존엄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칸트의 질문이 되살아나고, 소셜미디어가 공론장을 파괴할 때 하버마스의 통찰이 빛나며, 알고리즘이 우리의 사유를 결정할 때 푸코의 경고가 새삼 무섭게 다가옵니다. 서양 철학을 아는 것은 현대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강력한 렌즈를 갖추는 일입니다.

통일사상의 눈으로 본 2,500년 지성사의 의미

서양 철학 2,500년의 역사는 표면적으로 보면 수많은 철학자들이 충돌하는 혼란스러운 논쟁처럼 보이지만, 통일사상의 관점에서 내려다보면 놀랍도록 일관된 방향을 향해 움직여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심정 관계가 단절된 인류가, 지적 탐구를 통해 그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려 했던 처절하고 장엄한 복귀의 여정이었습니다.

플라톤이 이데아의 세계에서 찾으려 했던 절대적 진리는 하나님 원상 안에 담긴 창조의 청사진, 즉 로고스를 향한 갈망이었습니다. 칸트가 도덕 법칙의 절대적 근거를 세우기 위해 평생을 씨름했던 것은, 이성의 힘으로나마 도덕의 기초를 구하려 했던 고뇌였습니다. 마르크스가 소외된 노동자들의 해방을 꿈꿨을 때, 그 뜨거운 정의감의 뿌리에는 인간의 존엄성을 향한 복귀본심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서양 철학의 거장들은 저마다 진리의 한 조각씩을 붙들고 씨름했습니다. 통일사상은 이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의 완전한 그림으로 모읍니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4부로 펼쳐지는 지성사의 대서사

제1부 '고대·중세 철학'은 탈레스로부터 중세 스콜라 철학까지 약 2,000년의 여정을 담습니다. 신화에서 이성으로, 이성에서 신앙으로 이어지는 이 시대는 인류가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 법칙을 처음으로 이성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 섭리적 각성의 시대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우주의 본질을 묻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의 기초를 세우며,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가 기독교 신학과 철학을 통합하는 과정을 따라갑니다.

제2부 '인간의 각성과 주체의 해방'은 르네상스부터 헤겔까지를 다룹니다. 신 중심의 중세 질서가 균열되고 인간이 이성의 주체로 우뚝 서는 시대입니다. 종교개혁, 과학혁명, 대륙 합리론, 영국 경험론, 계몽주의, 칸트와 헤겔로 이어지는 이 찬란한 지적 행진은 인류를 해방시켰지만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역설적인 노정이기도 했습니다.

제3부 '근대 이성의 해체와 다원적 사조'는 헤겔 이후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를 다룹니다. 마르크스의 유물론, 니체의 허무주의,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폭발적으로 전개됩니다. 복귀섭리사 관점에서 보면 가인형 사조와 아벨형 사조가 최종 결산을 향해 전면적으로 분립하는 격렬한 투쟁의 시대였습니다.

제4부 '시스템의 감옥과 해체의 폭풍'은 구조주의부터 현대 정의론까지를 다룹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포퍼와 쿤의 과학철학,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 틸리히와 부버의 관계철학,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 그리고 롤스와 샌델의 정의론까지, 이 다양한 흐름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현대 문명의 위기에 응전하는 모습을 추적합니다.

개념이 아니라 인간으로 만나는 철학자들

철학은 언제나 한 사람 한 사람의 치열한 삶에서 태어났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앞두고서도 진리를 위해 독배를 택했습니다. 스피노자는 유대 공동체에서 파문당한 채 홀로 렌즈를 갈며 신과 자연의 합일을 사유했습니다. 니체는 정신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망치를 들고 모든 우상을 부수려 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막대한 부를 스스로 포기하고 시골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아이들과 씨름했습니다.

키르케고르의 파혼, 하이데거의 나치 협력과 그 배신, 아렌트의 망명, 틸리히의 추방, 이 모든 상처들이 그들의 사상을 관통하는 불꽃이었습니다. 한 철학자의 삶을 알 때 그의 사상이 왜 그런 방향으로 전개되었는지가 비로소 이해됩니다. 이 책은 철학자들을 어려운 개념의 제조자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상처와 갈망을 지닌 한 인간으로 만나게 합니다.

방황의 끝에서 발견하는 하나의 답

2,500년 서양 철학의 여정을 모두 따라간 끝에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결국 인류는 무엇을 찾아 이토록 오래 헤매었는가?' 그 답은 놀랍도록 단순합니다. 인류는 사랑받고 사랑하는 관계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탈레스가 우주의 근원을 물었을 때, 플라톤이 이데아를 갈망했을 때, 하이데거가 존재의 의미를 물었을 때, 그 모든 물음의 밑바닥에는 '이 우주에는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는가'라는 물음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통일사상은 그 물음에 답합니다. 이 우주를 창조하신 하늘부모님은 인격적 사랑의 주체이시며, 타락은 그 사랑의 관계를 단절시켰지만, 참부모님을 통해 인류에게 회복의 길이 열렸습니다. 서양 철학의 위대한 지성들이 저마다 진리의 한 조각씩을 발견했고, 그 조각들이 통일사상 안에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으로 모입니다.

이 책은 서양의 위대한 철학자들을 비판하거나 그들의 오류를 들추어내려는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지난 2,500년 동안 인류가 쌓아 올린 이 찬란한 지성들을, 우리와 똑같은 상처와 고뇌를 안고 진리를 향해 몸부림쳤던 '동료들'로 만날 것입니다. 그들이 쏟아낸 방대한 개념과 복잡한 논리들은, 결국 더 깊은 사랑과 진리를 갈구했던 그들의 절실한 손짓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철학자들과 함께 진리를 향해 뻗었던 그들의 손을 깊이 존경하며, 그들이 평생 닿고자 했으나 끝내 언어로 다 담지 못했던 그곳이 어디였는가를 함께 찾아가는 여정을 떠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인류 지성사의 기나긴 방황이 끝나고 참된 종착지에 매우 가까이 와 있습니다. 우리는 왜 아직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다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방향이 보입니다.

차례

프롤로그 / 우리는 왜 아직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가 ·4
이 책을 더 깊이 읽기 위하여 / 통일사상의 핵심 개념 15가지 ·14

제1부 고대·중세 철학

존재의 시원(始原)과 이성의 탄생
제1장 만물의 아르케(Arche)를 찾아서: 밀레토스의 사상적 혁명 ·32
제2장 수(數)와 변화의 철학: 피타고라스에서 원자론까지 ·39
제3장 인류의 등에, 소크라테스: 무지의 자각과 진리를 향한 독배 ·48
제4장 영원한 원형의 탐구: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이상 국가 ·56
제5장 대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현실의 형이상학 ·65
제6장 흔들리는 세계와 내면의 요새: 헬레니즘 철학에서 신플라톤주의까지 ·74
제7장 카타콤에서 황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중세 신학의 여명 ·83
제8장 지적 대성당의 건축과 황혼: 아퀴나스에서 오컴까지 ·91

제2부 인간의 각성과 주체의 해방

르네상스에서 근대 합리주의까지
제1장 잠들었던 인간의 부활: 르네상스와 이탈리아의 인본주의 혁명 ·102
제2장 영혼의 혁명: 종교개혁과 신 앞에 선 단독자 개인의 각성 ·111
제3장 로고스의 확장: 과학 혁명과 기계론적 세계관의 탄생 ·121
제4장 생각하는 나의 탄생: 대륙 합리론과 이성의 자율성 ·128
제5장 백지 위의 세계: 영국 경험론과 감각의 탐구 ·137
제6장 이성의 광장: 계몽주의와 사회계약론의 전개 ·146
제7장 비판 철학의 대종합: 칸트와 인식·가치의 통일 ·154
제8장 절대 관념론과 역사의 변증법: 헤겔의 장엄한 완성 ·164

제3부 근대 이성의 해체와 다원적 사조

물질과 실존, 그리고 무의식의 역학
제1장 거인의 몰락과 지성사의 분열: 헤겔 좌파와 우파의 탄생 ·174
제2장 지상의 왕국을 꿈꾸는 자들: 유물론의 폭주와 하나님 없는 인간 ·184
제3장 행복의 산술과 도덕적 품격: 공리주의와 자유의 가치 ·194
제4장 이성의 동결과 생(生)의 역동성: 비합리주의와 생의 철학 ·205
제5장 망치를 든 예언자와 신의 죽음: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서막 ·216
제6장 하나님 앞의 단독자와 신앙의 비약: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개척 ·224
제7장 존재의 부름과 자유의 형벌: 하이데거와 사르트르, 그리고 카뮈 ·232
제8장 무의식의 심연과 본능의 역습: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242

제4부 시스템의 감옥과 해체의 폭풍

구조주의에서 현대 정의론까지
제1장 언어와 구조의 감옥: 소쉬르와 구조주의 ·252
제2장 언어의 한계와 침묵의 가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261
제3장 과학적 엄밀성의 해체와 패러다임 혁명: 포퍼와 쿤 ·269
제4장 도구적 이성의 파탄과 악의 평범성: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한나 아렌트 ·279
제5장 무의미의 절망을 이기는 용기: 슐라이어마허와 폴 틸리히의 영성 신학 ·287
제6장 나와 너, 그리고 공론장: 부버와 하버마스의 관계 철학 ·298
제7장 해체와 차이의 폭풍: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발 ·307
제8장 정의란 무엇인가: 롤즈와 샌델의 현대 정의론 ·314

에필로그 / 인류 지성사의 방황과 참된 종착지 ·323
가정연합 식구들께  ·330
부록 / 2,500년 지성사의 철학자 75인 요람 ·335
참고문헌 ·343

본문 속으로

501명의 배심원단이 281대 220으로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비굴하게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소크라테스: “나는 여러분의 명령보다 진리를 탐구하라고 명령하신 신의 음성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오늘 나를 죽인다면, 여러분은 신께서 게을러진 아테네라는 거대한 군마를 끊임없이 깨우라고 붙여주신 단 하나의 등에(Gadfly)를 영원히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공자·석가모니·예수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지식을 파는 소매상이 아니라, 왜 선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신의 전 생애와 숭고한 죽음으로 역사 위에 증명해 보인 인물이었습니다. (52)

어느 날 한 죄수가 결박을 풀고 고통스러운 오르막길을 올라 마침내 지상에 섭니다. 눈이 멀 것 같은 통증 끝에 눈이 적응하자, 그는 만물의 실상과 빛의 근원인 ‘태양’ 그 자체를 목격합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실재라고 믿었던 것들은 모두 그림자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플라톤의 비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진리를 깨달은 이 사람은 다시 동굴 아래로 내려갑니다. 왜일까요? 아직도 그림자를 실재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비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빛에 적응한 눈으로 어둠 속에 들어온 그는 다른 죄수들보다 오히려 그림자를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동굴 속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저 사람, 지상에 다녀오더니 오히려 눈이 나빠졌군. 위로 올라가는 것은 쓸모없는 짓이야.” (58~59)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는 완벽한 설계도를 그려놓았지만 그 집에 살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건축가와 같습니다. 법칙은 있으되 그 법칙을 만든 동기—심정(心情)—가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인류 역사상 가장 정교하게 파악했습니다. 그러나 성상(性相)적 본질—심정, 사랑, 인격성—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유하는 사유’를 신의 본질로 규정했지만, ‘사랑하는 사랑’에는 닿지 못했습니다. 그 한 걸음의 거리가 철학과 신앙의 경계입니다. 그러나 그를 탓할 수 없습니다. 540여 종의 동물을 직접 해부하며 우주의 목적을 추적한 그의 여정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가장 치열한 지적 순례였습니다. 그 손이 닿으려 했던 곳에, 사랑을 통해 기쁨을 얻고자 하신 하나님의 심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72~73)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생각하는 나’에서 출발했지만, ‘사랑하는 나’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통일사상 원상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은 이성이 아니라 심정(心情)—사랑을 통해 기쁨을 얻고자 하는 정적인 충동—입니다. 이성만의 출발. 이것이 근대 이후 서양 문명이 ‘이성은 발달했으나 사랑은 메말랐다’는 불균형을 겪게 되는 원초적 기점이 되었습니다. 데카르트 이래 근대 서양 문명은 ‘독립적인 개인의 이성적 판단’을 모든 것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 독립적인 개인이 다른 개인과 어떻게 연결되는가—어떻게 사랑하는가—에 대한 답은 합리론의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통일사상의 출발점은 ‘나는 생각한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셨기에 나는 존재한다’입니다. 존재의 기반은 사유가 아니라 심정입니다. (134~135)

칸트의 정언명령(定言命令)—오직 의무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행위하라—은 서양 철학사에서 도덕의 보편적 근거를 세우려 한 가장 장엄한 시도였습니다. 칸트의 정언명령은 완벽한 악보는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악보를 실제 소리로 만들어낼 연주자, 즉 타자를 향한 사랑의 동력인 심정이 없었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다시 떠올려봅시다.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이것은 지식의 부족이 아닙니다. 법칙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이 실존적 균열은 칸트의 이성 도덕론으로 해명되지 않습니다. 선행의 진정한 동력은 이성적 의무감이 아니라 타자를 향한 사랑의 정적인 충동—심정입니다. 칸트의 도덕법은 차갑게 옳습니다. 통일사상이 추구하는 도덕은 따뜻하게 옳습니다. (161~162)
헤겔의 변증법과 통일사상의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을 나란히 놓으면 구조는 닮았습니다. 정에서 분으로, 분에서 합으로. 그러나 심장이 다릅니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발전의 동력은 모순과 투쟁이고, 통일사상의 정분합작용에서 동력은 심정을 중심한 수수작용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적대적 대립이 아니라 사랑의 주고받음을 통해 가정이라는 더 높은 가치를 창조하듯, 역사는 투쟁이 아니라 심정의 교환을 통해 전진합니다. 헤겔의 절대정신은 통일사상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원상(原相) 가운데 이성적·구조적 측면을 정확히 포착한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정신은 인격이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고, 그리워하지 않으며, 자녀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통일사상의 하나님은 심정을 가진 인격적 존재이며, 창조는 자기 전개가 아니라 자녀를 사랑하기 위한 결단이었습니다. (169~170)

마르크스가 런던 소호 빈민가의 좁은 방에서 자녀를 굶기며 『자본론』을 쓰던 장면을 먼저 떠올려봅시다. 그의 분노는 추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도 자본주의의 희생자였던 사람이 목격한 현실의 고통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 분노의 뿌리에 인간 존엄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는 것—이것만큼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 분노는 한 시대의 감정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99년 BBC가 인류에게 ‘지난 천 년 최고의 사상가’를 물었을 때, 아인슈타인과 뉴턴과 다윈을 제치고 1위에 오른 것은 마르크스였습니다. 그가 죽은 지 한 세기가 넘었고 그의 이름으로 세워진 체제들이 대부분 무너져 내린 뒤에도, 인류는 그가 던진 질문—분배는 정의로운가, 노동은 왜 인간을 소외시키는가—을 가장 절박한 것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191~192)

그러나 이 계산이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을 희생시키는 것이 옳은가—이 고전적 트롤리 문제 앞에서 우리의 도덕적 직관은 계산을 거부합니다. 밤새 아픈 아이를 간호하는 어머니의 행위를 생각해 봅시다. ‘쾌락―고통’의 수식으로 계산하면 이 행위는 의미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왜 아름다운 행위인지를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쾌락의 극대화가 아니라 사랑의 투입이기 때문입니다. 계산기가 이 아름다움을 포착하지 못한다면, 문제는 직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산기에 있는 것입니다. (202)

1889년 1월 3일 토리노 광장에서 마부에게 채찍질당하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쓰러진 니체를 생각해 봅시다. 평생 ‘약자의 동정심’을 조롱한 사람이, 고통받는 짐승을 향한 격정적 연민 속에서 무너졌습니다. 이 역설 안에 니체 철학의 본질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비판한 바로 그것—타자의 고통에 반응하는 심정—을 지우지 못했습니다. 지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 통일사상이 니체의 ‘신은 죽었다(Gott ist tot)’는 선언에서 읽어내는 것은 전면적 부정이 아닙니다. 정확한 진단과 잘못된 처방의 비극적 결합입니다. 요강 원상론은 이렇게 비평합니다. “니체의 실패는 참된 신까지 부정한 데 있다. 그가 망치로 내리쳐야 했던 신은 거짓 신이었다.” (221~222)

오늘날 이 문제는 더 이상 철학 강의실 안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ChatGPT와 같은 거대 언어 모델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 게임’을 놀라울 만큼 정교하게 흉내 냅니다. 문맥에 맞는 대답을 생성하고, 농담의 타이밍을 맞추고, 위로의 말까지 건넵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살아 있다면 한 가지를 물었을 것입니다—이 기계는 ‘삶의 형식’을 공유하고 있는가? AI는 규칙을 학습하지만 아파본 적이 없고, 슬퍼본 적이 없으며,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습니다. 통일사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AI에 결여된 것은 ‘삶의 형식’만이 아니라 심정입니다. 심정 없는 언어는 소리일 뿐 말씀이 아닙니다. (266~267)

“모든 참된 삶은 결국 만남이다(All real living is meeting).” 부버가 남긴 이 한 문장을 읽으면서, 통일사상은 깊이 공명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의 물음을 던집니다. 그 만남은 어디서 완성됩니까? 부버의 나와 너(Ich―Du) 관계론은 통일사상 수수작용의 가장 아름다운 인간적 표현이었습니다. 타인을 도구(그것, Es)로 보기를 멈추고 존엄한 인격(너, Du)으로 대면할 때, 그 관계의 종착지에서 ‘영원한 너(Das ewige Du, 하나님)’를 만나게 된다는 선언은, 수평적 인간 관계가 수직적 신인(神人) 관계로 이어진다는 장엄한 통찰이었습니다. 부버가 갈망한 영원한 너와의 만남은 추상적 신비 체험이 아니라, 참사랑이 완성된 가정이라는 구체적 장소에서 실현됩니다. (304)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가장 뜨거운 화두는 단연 ‘공정’입니다. 오늘날 MZ세대가 외치는 ‘과정의 공정성’은 롤즈가 평생을 바쳐 정초한 절차적 정의의 메아리이며, ‘능력주의의 허구와 공동체적 책임’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샌델이 던진 공동체주의적 비판의 한국적 변용입니다. 이제 우리는 정의론의 최종 결론을 마주합니다. 진정한 정의는 ‘무지의 베일’ 뒤에서 서로를 경계하며 맺는 계약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부모와 자녀, 그리고 만물이 삼대축복을 실현하는 사위기대 안에서,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고 그 성장을 돕는 참사랑의 수수작용입니다. 계산하는 이성이 아니라 심정이 정의의 토대입니다. 그곳에서 롤즈의 공정함과 샌델의 공동선은 참사랑을 중심으로 공생(共生)·공영(共榮)·공의(共義)로 수렴됩니다. (320~321)

저자소개

권 상 기

1966년 출생.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중, 1993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통일원리와 통일사상을 철학적 토대로 삼아 오랜 세월 연구와 실천을 이어왔으며, 서양철학의 흐름을 통일사상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작업에 매진해 왔다.
1990년대 초반부터 일본 내 한국의 이미지 제고와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한국어 강사 및 한국 문화 전파에 앞장섰다. 재일 민단과 총련, 그리고 일본 사회의 화합을 도모하며 남북통일 운동에 헌신했고, 청년·학생들을 위한 교육 및 장학 사업과 양국 간의 교류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며 한일 민간 외교의 가교 역할을 해왔다.
세계적으로 만연해지는 자국 중심주의와 우경화, 그로 인한 차별과 증오의 근본적 해결책으로 통일원리에 기초한 ‘공생(共生)·공영(共榮)·공의(共義)주의’를 연구하며 실천적 활동에 매진해 왔다. 2026년 초 33년간의 선교사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현재 ‘공생공영공의연구소’를 설립하고 한국을 거점으로 활발한 연구와 평화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인 아내와 사이에 4녀 1남을 두고 있다.
저자 연락처│전화 010-6754-3013, 이메일 ksgy2035@gmail.com, 홈페이지 kjbridg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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