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앤북스 코너, 디바인 매트릭스, 느낌이 현실이 된다 네 번째 시간은 3장을 읽어보는 시간으로, 주제는 "우리는 수동적 관찰자인가, 강력한 창조자인가"입니다. 따끈한 커피 한 잔을 곁에 두고 가을볕이 길게 드는 창가에 앉아, 나는 세상을 구경하는 사람인지 만들어 가는 사람인지 조용히 물어보는 시간은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라 좋습니다.

한 사람의 말에서 시작된 오래된 경고

19세기 중반, 한 원주민 추장이 낯선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사람은 생명의 망을 짜지 않았고, 그저 그 망 안의 한 가닥일 뿐이며, 사람이 망에게 하는 모든 일은 곧 자기 자신에게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문장은 지금도 낡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보이는 모든 것의 일부로서 자신과 세계,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과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존재라는 관점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화 안에서 사람의 감정과 느낌, 기도와 믿음은 매 순간 우주에게 건네는 말이 됩니다. 몸의 활력부터 세계 평화에 이르기까지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그 말에 대한 우주의 응답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참여한다'는 말에 담긴 뜻

이 관점의 열쇠는 '참여'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우주에서 사람은 방정식의 일부가 되어, 자신이 창조하는 것을 경험하는 존재인 동시에 삶에서 일어나는 일의 촉매가 됩니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일어납니다. 사람은 변화하고 있는 우주의 일부이며, 우주를 바라보는 자그마한 일부인 동시에 우주를 만들어 가는 일부이기도 합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결론은 간단하지만 파격적입니다. 의식을 집중하는 행위, 곧 무언가를 바라보며 관찰하는 행위가 우주를 창조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과학은 물질의 가장 작은 입자를 찾고 우주의 경계를 밝히려 하지만, 무엇인가가 존재하리라는 기대를 품고 바라보는 행위가 바라보는 대상을 만들어 버릴 수 있다면 탐구의 끝은 영원히 손에 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투병 중인 사람에게 건네진 이상한 처방

의식의 힘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이야기로 이런 사례가 전해집니다. 불치병 진단을 받아 몸이 쇠약해진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한 가르침이 주어졌습니다.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대신 이미 나은 것처럼 느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논리를 뒤엎고 건강해진 자신의 모습에 놀라는 의사의 얼굴을 상상해 보고, 그 놀라움 속에서 "이건 기적이야" 하고 외치는 장면을 그려 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 가정 속에서 살기 시작했고, 몇 달 후 건강을 되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과보다 방식입니다. 이 사람은 단순히 회복되기를 빌지 않고 이미 치유되어 건강하다고 느끼며 살았습니다. 결과를 향해 노력하는 것과 이미 결과를 이룬 양 느끼는 것 사이에는 미묘하지만 큰 차이가 있습니다. 노력은 끝을 알 수 없는 여행이지만, 이미 이루어졌다는 느낌은 도착한 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손이 바닥에 닿기 전에 이미 닿은 사람

이 원리가 몸으로 구현되는 장면은 무술 수련에서도 발견됩니다. 두꺼운 콘크리트 블록을 손으로 격파하는 시범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기술을 행하는 사람은 의식을 블록이 놓인 바닥 위의 한 점에 모읍니다. 손이 바닥에 닿으려면 바닥과 손 사이의 공간을 가로질러야 하는데, 그 공간에 우연히 블록이 놓여 있다는 사실은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이들은 격파가 얼마나 어려운지가 아니라 이미 격파했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을 어디에 집중하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일화도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어느 수련장에서 한 스승이 제자들 앞에서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었습니다. 호흡이 점점 느려지더니 숨을 쉬지 않는 듯 멈춘 모습이 되었고, 제자들이 힘을 합쳐 밀고 당겨도 스승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잠시 뒤 눈을 뜬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양팔이 양쪽 산봉우리에 사슬로 묶여 있고 자신은 그 사이에 앉아 있다고 상상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산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생한 느낌 앞에서는 수십 명의 힘도 무력했습니다. 스승이 스스로 사슬을 풀기로 결심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를 옮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가능성은 여럿이지만 현실은 하나뿐입니다

이쯤에서 의문이 생깁니다.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의 방향까지 생각만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양자 물리학이 밝혀낸 몇 가지 사실을 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극소 세계에서는 물질이 일상 세계와 전혀 다르게 행동하고, 에너지는 파동이나 입자로 자신을 드러내며 때로는 둘 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관찰자의 의식이 에너지의 행동 방식을 결정합니다.

이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실험이 '이중슬릿' 실험입니다. 작은 구멍이 두 개 뚫린 벽을 향해 전자 같은 입자를 쏘면, 구멍이 하나뿐일 때는 예상대로 입자처럼 한 구멍을 지납니다. 그런데 구멍이 두 개일 때는 같은 입자가 파동처럼 두 구멍을 동시에 통과한 듯한 무늬를 남깁니다. 이 결과는 전자가 두 번째 구멍의 존재와 가능성을 어떻게든 '알고' 있어야 설명됩니다. 그런데 전자가 무엇을 알 수 있는 존재라고 보기는 어렵고, 이를 아는 존재는 실험을 지켜보는 사람뿐입니다. 전자가 통과할 수 있는 구멍이 두 개 있다는 것을 아는 관찰자의 의식이 전자의 여행 경로를 결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세 가지 해석이 가리키는 같은 방향

이 기이한 결과를 설명하는 이론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코펜하겐 해석으로, 지금까지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이론입니다. 우주는 무한하게 겹쳐 있는 가능성으로 존재하다가, 무엇인가가 일어나는 순간 그중 하나로 고정된다고 봅니다. 그 '무엇인가'가 바로 관찰하는 의식입니다. 다만 이 이론은 누군가 바라보지 않으면 우주가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 되고, 중력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현실을 선택하는 세 가지 과학적 관점이 공통으로 가리키는 하나의 진실
현실을 선택하는 세 가지 과학적 관점이 공통으로 가리키는 하나의 진실

둘째는 다세계 해석입니다. 모든 가능성이 이미 존재하고 동시에 진행되고 있으며, 각각의 가능성은 서로 보이지 않는 별개의 우주에서 펼쳐진다는 관점입니다. 사람은 하나의 우주에서 하나의 시간 흐름을 따르다가, 때로 다른 우주의 다른 가능성으로 도약하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셋째는 중력을 포함한 해석입니다. 모든 가능성은 저마다 중력장을 만들고 이를 유지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한데, 필요한 에너지가 많을수록 그 가능성은 불안정해집니다. 그래서 가장 안정된 하나의 가능성만 남고, 그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이라는 설명입니다.

어느 해석이 옳은지는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세 이론에는 공통된 결론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 곧 의식을 집중하는 대상이 무한한 가능성 중 하나를 현실로 만든다는 점입니다. 어느 이론이든 각자 설명하지 못하는 '빠진 고리'가 있는데, 그 고리가 바로 만물을 담는 그릇으로서 모든 것을 잇는 매트릭스의 역할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선택은 말이 아니라 존재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현실을 어떻게 선택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나는 이 현실을 선택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가능성을 선택하려면 그 가능성의 존재 방식대로 살아야 합니다. 새로운 상태에 자신을 내맡기고, 더 이상 옛 상태가 아닌 새로운 상태에 살면서 그 상태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부딪히는 함정도 있습니다. 눈앞의 힘든 현실을 부정하며 괜찮다고 되뇌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회피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병에 걸렸다면 아픈 몸 너머를 보고, 그가 이미 치유되었으며 새로운 현실에 함께 있다고 생각하고 느껴야 합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하거나 '소망'하는 것과 그 현실의 결과물이 깨어날 수 있도록 생각과 느낌과 믿음으로 철저히 따르는 것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끔찍한 현실을 치유의 현실로 대체하려는 행동을 취하지 않는 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절망이나 실망만큼이나 무익합니다.

느낌이 곧 기도입니다

이 대목에서 오래된 가르침이 등장합니다. 어느 고원 지대의 사찰에서 오랫동안 수행해 온 한 스님은, 방문객이 기도의 방식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고 전해집니다. 기도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방문객이 본 것은 우리가 몸 안에 느낌을 만들어내기 위해 하고 있는 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느낌이 곧 기도라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앞서 본 양자 실험과 정확히 포개집니다. 외부 세계의 원자와 전자, 광양자를 변화시키는 것은 바깥으로 내뱉는 말이 아니라 안에서 느끼는 느낌입니다. 우주의 양자적 힘과 소통하는 언어는 감정이며, 매트릭스가 인식하는 언어는 바로 느낌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고대 문헌의 번역을 되짚어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옵니다. 흔히 "구하라, 그리하면 받을 것이다"로 알려진 구절은 원문을 풀면, 이미 응답받았다는 느낌에 흠뻑 젖어서 열망하는 것들로 에워싸이고 기쁨으로 충만해지라는 뜻에 가깝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치유가 일어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가 이미 일어났다는 느낌으로 말하라는 것입니다.

아무 느낌이나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따릅니다. 만약 모든 감정이 현실을 만든다면 이 사람의 감정과 저 사람의 전혀 다른 감정이 얽혀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었을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수행자의 가르침에 따르면, 매트릭스와 소통하는 감정은 자비심입니다. 자비심은 우주의 힘인 동시에 우주와 소통하는 인간의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상황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다가간다는 뜻입니다. 판단이나 에고 없이 상황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열망이 강할수록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은 오히려 위축됩니다. 소망에 에고가 끼어들기 때문입니다. 치유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치유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셈이기도 합니다. 집착 없이 자유롭게 힘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그럴 때 기도가 더욱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마음,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한다거나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내지 않는 상태가 현실을 바꾸는 가장 큰 비결로 제시됩니다.

기적이 멈추는 순간

이 존재 상태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평화를 비는 명상과 기도를 대규모로 실험한 연구에서도 드러납니다. 실험 기간 동안 연구자들이 관찰한 교통사고율과 응급실 이용률, 심지어 폭력 범죄까지 통계적으로 의미 있게 줄어들었다고 보고되었습니다. 그러나 실험이 끝나자 폭력성은 다시 돌아왔고 실험 전보다 더 높은 수치로 치솟았습니다. 훈련받은 참가자들이 명상과 기도를 그만두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시사점이 있습니다. 새로운 현실이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을 멈추는 순간 영향력도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치유와 평화, 풍요의 느낌이 몇 분만 지속된다면 현실 만들기는 일시적 현상으로 끝납니다. 현실 만들기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여야 합니다. 느낌이 선택의 방법이기에, 항상 느끼고 있다면 항상 선택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삶은 언제나 물리 법칙만 따르지는 않습니다

세계를 이루는 물질이 동시에 두 곳에 있을 수 있다면, 그 세계의 일부인 사람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동서고금의 기록은 흥미로운 흔적을 남겨 왔습니다. 대홍수 이야기가 서로 다른 대륙과 민족에서 거의 똑같이 전해지는 것처럼, 한 사람이 거의 같은 시간에 전혀 다른 두 장소에서 목격되었다는 이야기도 여러 문화권에 걸쳐 나타납니다. 주로 수행자나 신비주의자, 곧 사랑과 자비 같은 감정적 능력이 크게 발달한 사람들에게서 보고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백 년 전 어느 수도원의 수녀는 한 번도 수도원을 떠난 적이 없다고 주변이 증언했는데도, 자신이 깊은 명상 상태에서 머나먼 땅으로 '날아가' 그곳 사람들을 만났다고 진술했습니다. 훗날 그 땅의 사람들에게서 그녀가 전했다는 가르침과 일치하는 증언이 확인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20세기의 전쟁 중에도 한 수도사가 폭격기 앞 하늘과 예배당 안에 동시에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을 헛소리나 간절한 소망이 빚어낸 환상으로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백 년에 걸쳐 반복된 일치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물음은 남습니다.

보이지 않던 배를 보게 되는 순간

이 이야기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한 가지로 모입니다. 우리가 한계라고 믿는 것은 정말 한계일까요? 오래전 어느 해안의 원주민들은 바다에 닻을 내린 낯선 대형 선박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돛대와 돛이 달린 거대한 배라는 개념 자체가 그들의 경험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눈은 수평선 위의 배를 분명히 담았지만, 뇌가 그것을 이해할 틀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족의 주술사가 평소와 달리 사팔눈을 만들어 바라보다가 배를 알아보자, 다른 사람들도 몇 시간 전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새로운 것을 기꺼이 시도하려는 의지에 기대어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의 사람들도 그 원주민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세계와 우주와 자신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본다면, 눈앞에 무엇이 나타날지는 그저 상상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전자가 동시에 두 곳에 있을 수 있는 조건을 알아내듯, 사람도 삶에서 기적이 만들어지는 조건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 이 장의 마지막 질문입니다. 그 열쇠는 자신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존재의 한 단면, 곧 홀로그램의 힘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