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인 매트릭스, 느낌이 현실이 된다 첫번째 시간은 이 책의 서문을 읽어보는 시간으로 주제는 "관찰자에서 참여자로, 그리고 감정이라는 언어"입니다. 커피를 내려 가을볕 따뜻한 베란다 편한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시간은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라 좋습니다.

절벽 끝에서 들려온 한마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짧은 우화가 있습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절벽 끝으로 오라는 말을 듣습니다.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너무 높다고 버티던 사람들은 계속되는 권유에 마지못해 끝으로 다가갑니다. 그때 누군가 등을 살짝 밀고, 사람들은 추락하는 대신 날아오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날아오른 결과보다 그 직전의 순간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던 진실의 경계 안에서는 결코 날 수 없다는 사실을 그 순간까지 알지 못했습니다.

삶에서 진실이라고 믿어 온 것들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이처럼 두렵습니다. 그러나 성장은 언제나 믿음의 가장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고정관념이 바뀌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가능성도 함께 달라집니다. 지금부터 다룰 이야기는 그 경계 너머에서 발견된 한 가지 관점에 관한 것입니다.

우주의 구경꾼인가, 공동 창작자인가

현대 과학을 대표하는 지성들 사이에서도 오랫동안 이어져 온 논쟁이 있습니다. 인간은 이미 완성된 우주를 잠시 스쳐 지나가는 수동적인 관찰자인가, 아니면 우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하는 존재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전자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 바깥에는 인간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거대한 세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그 세계의 일부분만 겨우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이고, 우주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습니다. 반대편에는 이 생각을 정면으로 뒤집은 물리학자들이 있습니다. 두꺼운 유리판 뒤에 안전하게 숨어서 우주를 구경한다는 생각 자체가 지극히 낡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이들은 '관찰자'라는 낡은 단어를 지우고 '참여자'라는 새로운 단어를 써넣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주장은 철학적 수사에 그치지 않고, 20세기 양자 물리학 실험이 보여 준 결과에 뿌리를 둡니다. 전자처럼 미세한 입자는 누군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아니 잠깐 관심을 두기만 해도 그 짧은 순간에 성질이 달라집니다. 관찰한다는 행위가 곧 창조의 행위가 되는 셈입니다. 세계는 이미 완성되어 사람을 기다리는 무대가 아니라, 사람의 의식과 함께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현장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를 낳는다

이러한 관점을 한 걸음 더 밀고 나간 이론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우주의 전부가 아니라, 더 깊고 높은 층위에 숨어 있는 질서가 바깥으로 펼쳐진 모습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이론에서는 바위와 바다, 숲과 동물, 사람처럼 서로 분리되어 보이는 모든 것을 '드러난 세계'에 속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모든 것을 하나로 엮고 있는 보이지 않는 층위를 '감추어진 세계'라고 부릅니다.

가장 쉬운 비유는 바다의 파도입니다. 해변에 부서지는 물결은 저마다 다른 모양과 크기로 솟았다 가라앉지만, 어느 파도도 바다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파도는 같은 물이 잠시 취한 일시적인 형태일 뿐이어서, 각각은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상대적인 독립성만 지닙니다. 사람과 사물이 서로 별개로 보이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모양이 달라 보일 뿐 모두 하나의 흐름에서 나왔다는 것이지요.

이 구조를 가장 간결하게 보여 주는 사례가 홀로그램입니다. 홀로그램 필름은 아무리 작은 조각으로 잘라도 그 안에 전체 영상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카락 한 올, 손톱 한 조각, 혈액 한 방울 어디에서든 동일한 유전자 정보가 나오는데, 이는 몸의 모든 부분이 전체의 설계도를 품고 있다는 뜻입니다. 부분이 전체를 담고, 전체가 부분 속에 비치는 구조가 우주의 기본 원리라면 '나'와 '세계' 사이의 경계는 생각보다 훨씬 흐릿해집니다.

과학과 고대의 지혜가 같은 곳을 가리키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관점이 오늘날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수천 년 전의 인도 경전과 고대 사막 지역에서 발견된 두루마리, 동아시아 선종의 가르침은 한결같이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더 크고 궁극적인 실재가 드리운 희미한 그림자이며, 그 배후에는 모든 것을 감싸는 하나의 의식의 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한 선종 문헌은 이 장을 '모자람도 남음도 없는 큰 허공'에 비유하고, 사람이 조화를 잃는 이유를 스스로의 판단이 그 고요함을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의심이 일어날 때마다 '둘이 아님'을 기억하라는 가르침은 분리의 착각을 거두라는 처방이었습니다. 양자 물리학과 고대의 지혜는 서로 다른 언어를 썼지만, 우리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보이는 세계의 성공과 실패, 관계와 직업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같은 결론에 닿아 있습니다.

작품이 곧 화가이고, 캔버스가 곧 물감이다

이 관점에서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흔히 예술가는 작품과 분리된 존재입니다. 화가가 있고, 캔버스가 있고, 완성된 그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잇는 에너지의 장이 실재한다면 이 구분은 사라집니다. 사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인 동시에 그림이 그려지는 캔버스이고, 붓이면서 물감입니다.

당신은 화가이자 캔버스이며, 붓이자 물감입니다. 믿음과 감정으로 현실을 창조하는 공동 창작자의 구조.
당신은 화가이자 캔버스이며, 붓이자 물감입니다. 믿음과 감정으로 현실을 창조하는 공동 창작자의 구조.

이 개념은 이런 장면으로 상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어느 동화 속에서 인형을 만드는 장인이 마지막 한 땀을 놓는 순간, 인형이 스스로 눈을 뜨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인형은 자기 손으로 또 다른 인형을 만들고, 어느새 장인의 존재는 이야기 속에서 잊힙니다. 인형들은 스스로 개성을 지니고 살아가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갑니다. 물론 이 비유는 지나친 단순화이지만, 사람이 창조된 세계 안에서 스스로도 창조자일 수 있다는 미묘한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화가가 마음에 들 때까지 그림을 다듬듯, 사람은 믿음과 판단, 감정과 기도라는 팔레트로 자신의 인생 경험을 정교하게 다듬어 갑니다. 같은 캔버스 위에 같은 주제가 반복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장소에서 여러 사람과 관계, 직업, 지지와 배신의 역할극을 되풀이하고, 때로는 낯선 사람과 상황에서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느낌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사람이 가진 믿음을 비추는 투명한 스크린처럼 작동합니다. 영화관의 스크린이 필름의 내용을 판단 없이 그대로 비추듯, 연민과 사랑부터 분노와 배신까지 내면의 모든 속내를 편견 없이 보여 줍니다.

세상과 소통하는 단 하나의 언어, 감정

그렇다면 이 거대한 에너지의 장과는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까요? 고대의 지혜 전통은 그 언어가 단어의 나열도, 몸짓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 언어를 매일 쓰고 있습니다. 바로 감정의 언어입니다.

현대 과학은 감정이 몸의 화학 반응을 바꾼다는 사실을 확인해 왔습니다. 사랑과 공감, 용서 같은 긍정적 감정과 증오와 판단, 질투 같은 부정적 감정은 호르몬과 체내 상태를 달라지게 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감정의 영향은 몸 안에 머물지 않고 몸 바깥의 세계에까지 미친다는 것이 이 관점의 핵심입니다. 이 에너지의 장은 만물을 처음부터 끝까지 빈틈없이 덮고 있는 담요와 같아서, 몸과 삶은 물론 세상 만물이 그 담요의 섬유로 짜여 있습니다. 그리고 결혼과 이별, 우정과 직업 같은 모든 경험은 그 담요에 생겨난 주름에 해당합니다.

이 비유는 중요한 실마리를 줍니다. 새롭고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고 싶거나 마음이 따뜻한 사랑을 하고 싶다면, 그 바탕이 되는 장 안에 새로운 주름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주름을 만드는 도구가 바로 감정입니다. 컴퓨터가 0과 1이라는 코드로 작동한다면, 의식은 숫자도 알파벳도 아닌 감정으로 프로그래밍됩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용서하는 법은 누구나 이미 알고 있으므로, 별도의 훈련이나 사용 설명서가 없어도 누구나 이 언어를 쓸 수 있습니다.

여기가 곧 거기이고, 지금이 곧 모든 때이다

모든 것이 연결된 홀로그램적 관점에서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상식도 달라집니다. 부분 안에 전체가 담겨 있다면 '여기'와 '거기', '현재'와 '과거'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선한 소망과 기도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도움을 건넬 수 있으며, 눈을 감고도 시공간 너머를 느끼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삶은 매 순간의 선택으로 만들어집니다. 충만한 삶을 선사하는 깊은 호흡을 할 수도, 메마른 삶을 선사하는 얕은 호흡을 할 수도 있습니다. 타인을 말하고 생각할 때 존중을 택할 수도, 모욕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사소해 보이는 선택 하나하나가 초공간적인 의식의 힘으로 시공간을 뛰어넘어 영향을 미치고, 그 선택들이 모여 집단의 현실이 됩니다. 한 사람의 하루가 결코 하루로만 끝나지 않는 이유입니다.

두려운 세상에서 희망을 선택하는 방법

이 관점은 시대의 분위기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상처와 비판, 두려움이 넘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고 현실을 함께 만들어 가는 존재라면, 이 무력감은 사실과 다른 믿음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모든 것이 과학으로 완전히 증명된 것은 아닙니다. 에너지의 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과학자들도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연구해도 답을 찾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이러한 시각을 삶에 적용할 때 따라오는 변화입니다.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자신이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고, 그 깨달음은 더 평화롭고 따뜻한 사람이 되어 그런 자질을 반영한 세계를 만들어 가는 힘으로 이어집니다.

절벽 끝의 우화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날아오르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약간의 떠밀림, 곧 생각의 방식을 미세하지만 극적으로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이 대전환을 이룬 사람은 비밀스러운 열망과 드높은 꿈을 불현듯 손에 거머쥐게 됩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처럼 들리는 이야기이지만, 그 시작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자신이 구경꾼이 아니라 참여자임을 인정하고, 이미 알고 있는 감정의 언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의 감정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곧 어떤 세상을 그릴 것인가 하는 질문과 같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